Show must go on
작성자
아이스크림에듀 뉴스룸
작성시간
2018.12.05
조회수
177

사용설명서는 그만 쓰자

미니 빔 프로젝터를 구매했다. 종종 룸메이트와 집에서 영화를 시청하곤 하는데 이 기계를 사용하면 조금 더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째 생각처럼 조작이 되지 않았다. 여기저기 매만지다 어떤 승부에서 패배한 사람처럼 분한 기분으로 설명서를 펼쳐 들었다. 십여 분을 정독하며 손 위에 괸 턱을 몇 번 끄덕여 보이다 끝에 가서야 명쾌해진 얼굴로 설명서와 기계를 다시 박스에 집어넣었다. 당최 무슨 말씀들이신지……?

이뿐이랴? 핸드폰 약정서, 보험이나 세무, 근로 등등에 관한 온갖 법적인 계약서와 신청서, 이 사회에 존재하는 각개각종의 사용설명서들! 정말이지 분개하지 않을 수가 없는 노릇이다. 왜 이렇게 어렵게들 설명하느냐는 말이다!(이유가 있기야 할 테지만 나처럼 기계치에 독해력이 떨어지는 사람에게는 정말이지…) 그래 뭐, 좋다. 이른바 사용설명서라 이름 붙는 글쓰기 장르의 문법인 것일 테니까. 하지만 꼭 그러지 않아도 되는, 아니, 그래서는 안 되는 작문에서도 이와 비슷한 문법을 구사하는 실수를 우리는 자주 저지르고 만다. 딱딱하고 설명적이며 심지어는 정확하고 섬세하게 표현하고 싶은 마음에 독자로서는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은 서술을 길게 늘어뜨려 놓느라 오히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그런 문장을 작성해 버리는 것이다. 이런 글을 두고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딱딱하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자,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독자의 의식에 콕콕 박히는 글을 써보자.


출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일단 보여 주자

소설 쓰기의 기법 중에 ‘보여 주기’라는 것이 있다. 간접 제시라고도 하는데 작가가 직접 개입해서 설명하지 않고 말 그대로 이야기를 독자의 눈앞에 펼쳐 보이라는 말이다. 등장인물의 대화와 행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배경에 대한 정보를 인지시키며 사건을 주시하게끔 만드는 것. 이 기법의 장점은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면서 텍스트 자체에 집중하게끔 만든다는 점이다. 집중력이 높아진 독자는 굳이 내가 일일이 열거하지 않은 속사정이나 설정까지 읽어 내거나 생각지도 못한 허점 같은 공백을 채워 주기도 한다.

소설 쓰기의 기법, 이라고 말했으나 실은 거의 모든 종류의 글쓰기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글을 쓸 때 조금 더 보여 주기를, ‘쇼’를 해야 한다. 말하자면 자신이 전하려는 논지와 어울리는 어떤 예시, 에피소드 같은 것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얘기다. 지금 이 기고문의 도입부를 예로 들어 볼까 한다. 그러니까 설명서를 읽기 힘들어서 아직까지 박스에 담긴 채 사용되고 있지 않은 빔 프로젝터에 관한 짧은 삽화 말이다. 소설적으로 설명하자면 화자 임국영이라는 등장인물이 겪은 이야기와 그 당시 떠올랐던 감정과 생각에 관해 얘기를 함으로써 ‘사용설명서적 글쓰기는 무엇인가’를 설명한 도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사용설명서 같은 글쓰기를 설명하기 위해, 1) 한자어와 외래어를 활용한 전문적인 용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것, 2) 최대한 깨알 같은 장평과 자간으로 빽빽하게 글씨를 채워 넣어서 조금 멀리서 보면 지면 위에 활자가 아니라 일정한 법칙에 의해 뿌려진 까만색 모래 알갱이들의 집합처럼 보이게 만들 것, 3) 감정에 관한 딥러닝이 진행되지 않은 알파고처럼 사람 냄새라고는 일절 맡을 수 없는 어조를 유지할 것, 4) ……, 처럼 정의나 정보에 관한 서술을 늘어놓았다면 아마 효과가 달랐을 것이다.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자세하게, 보다 정확하게 글을 쓴다는 것이 꼭 어떤 한 주제에 관해 집요하게 서술을 이어 나가서 분량을 방대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활자를 읽는 행위 자체는 태생적으로 ‘백 마디 말’이라는 영역에 속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속에서도 마치 어떤 장면을 직접 목도하는 것처럼 연출할 수 있다는 것은 유쾌한 아이러니라고 생각한다. 글쓰기를 다채롭고 흥겹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비결은 바로 이 구체적인 예시를 드는 쇼맨십에서 비롯하는 무엇이 아닐까. 그러니까 쇼는 계속되어야만 한다. 언제까지나.



임국영 작가 | dlarnrdud89@naver.com

아침에 잠들고 밤에는 일하며 새벽에 소설을 쓴다. 농담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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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체0813~